한때 제가 산삼을 좀 캐러 다녔더랬습니다. 남편 왈 "내가 너랑 사니 별 꼴을 다 보고 산다."라고... 저는 나름 범생이라 생각하는데 이 기준이 애매한 게 남편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범생이예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범생이로 각이 잡힌 남편이 보기에 저는 천방지축, 특이한 캐릭터겠죠. 어찌 되었건 유별난 와이프 덕에 남편은 산삼 구경도 하고 먹기도 했습니다.
미국 중부 일리노이주에 살 때 한글학교 선생님을 했어요. 그곳 교장선생님과 또 한분의 선생님, 이렇게 셋이 한글학교의 무궁한 발전과 미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한글 교육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를 심층 토론하며 자주 만남을 가졌어요. 그 지역에서 꽤 역사가 깊은 한글학교이고 규모도 상당히 컸습니다. 성별도 나이대도 달랐지만 셋이서 참 잘 맞았어요. 지금도 교장선생님과 쌤과 연락을 하며 지내는데 그때가 그 한글학교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얘기하곤 해요. 한글학교 시스템도 바꾸고, 행사 등등 여러 면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하며 크게 발전된 시기였다 고요. 암튼 셋이서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기획하고 추진하고 그랬습니다. 물론 어바나 샴페인 맛집 탐방도 함께 했습니다.
미국은 자연에서 무언가를 채취할 때 라이센스가 필요합니다. 한국분들 고사리 캐러도 많이 다니시는데 그것 역시 라이선스가 필요합니다. 바닷가에 조개 캐러 갈 때도, 낚시를 할 때도 필요합니다. 만약 걸리게 되면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 당시 저는 영주권이 없던 때라 라이센스를 구입할 수 없었어요. 해당 라이센스는 온라인으로 쉽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라이센스가 없는 저는 산삼을 직접 캐서는 안 되었습니다. 또한 산삼을 제 몸에 소지해서도 안되었고요. 이미 교장선생님은 산삼을 캐러 많이 다녀보셔서 산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고 라이센스도 갖고 계셨어요. 그래서 저와 다른쌤은 산삼을 만지지 않고 산삼 찾기에 열중하기로 했어요. 가기 전에 미리 산삼이 어떻게 생겼는지 인터넷을 통해 찾아봅니다.
어느해 메모리얼 데이, 새벽같이 일어나 교장선생님 댁으로 모여 한 차로 산삼을 캐러 갔어요. 그때만 해도 두 딸아이들이 어렸던지라 엄마가 자리를 비우는 그 하루ㅡ 아이들 스케줄과 먹을 것 등등을 다 챙겨서 두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하고 집을 나섭니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하고 도착한 그곳은 무슨 야영지 같은 곳이에요. 일리노이에 산이 어디 있습니까? 허허벌판, 옥수수밭인걸요. 그래서 야삼이라 불러야 할까 모르겠어요. 곳곳에 텐트 치고 캠핑하는 사람들을 지나면서 함께 간 쌤과 막 웃으며 우리 산삼 캐러 가는 것 맞냐고 여고시절 소풍 간 것 마냥 그렇게 신나게 산삼을 캐러 갔어요. 긴 막대기를 하나씩 주워 챙겨 들고는 풀숲을 헤치며 점점 안으로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나, 산삼이 보여요. 너무나 신기한 게 제 눈에는 산삼이 보여요. 전날 인터넷에서 본 산삼 모습 같아서 이거 산삼 아니에요? 했는데 바로 옆에서 그걸 못 보시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제가 가까이 가서 손으로 가리키니 그때서야 보이신다고, 분명 아까는 보이지 않았다고 하세요. 재능 발견, 산삼을 잘 찾습니다. 산삼은 그냥 얼핏 보기에 너무 평범한 듯 보여 눈에 잘 띄지 않아요. 빨간 꽃 같은 열매가 보이면 좀 더 찾기 쉬운데 온통 초록 풀밭에서 산삼을 모르는 사람들은 찾기 어려울 듯싶어요.
심마니들의 의식이 있습니다. 산삼을 그냥 캐와서는 안되고 빨간꽃같은 열매를 따서 산삼이 난 자리에 그대로 묻어두고 오는 거예요. 그래야 다음에 그 자리에서 다시 산삼을 캘 수 있다고 해요. 심마니들만의 표식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기억이 어렴풋한데 교장선생님께서 무슨 표식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산삼을 캐서 내려왔어요. 교장선생님 댁으로 돌아와서는 산삼을 만질 수 있어서 신기해하며 보고 나눠갖고는 의기양양 심봤다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어요.
산삼을 보니 한국에 계신 부모님, 시부모님 생각이 났어요. 그런데 도무지 한국으로는 보낼 수는 없었고, 네 식구가 뿌리에 잎까지 야무지게 나눠서 먹고 부모님들 생각에 몇뿌리 일단 장기 보관해 보기로 합니다. 산삼 장기보관하는 요령은 페이퍼 타월에 물을 묻혀 산삼을 감싼 다음 랩으로 싸서 냉장 보관하면 싱싱하게 보관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해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은 미국에 오시지 못했고, 큰아이가 돼지독감에 걸리면서 큰아이에게 남은 산삼을 주었어요.
미국내에 산삼을 전문으로 캐러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요. 한 대학생은 산삼 채취로 스스로 학비를 마련한다는 글도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땅이 다르니 효능은 한국의 산삼과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지만 미국에서도 여전히 산삼은 귀한 약초로 알려져 있어요. 그때 당시, 싸이월드에 산삼을 올렸었는데 지금은 싸이월드에 들어가지 못해서(비밀번호를 잊어버리고, 미국에 살고 있어서 인증이 안되어서) 아쉬워요. 나중에 한국에 방문하면 다시 시도해보리라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장선생님은 매해 산삼을 캐서 집 뒤편에 심어 장뇌삼밭을 만드셨어요. 어느 날 교회 집사님께서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교장선생님께서 집에 있는 삼을 꾸준히 복용할 수 있게 도와드렸고, 나중에는 거의 완치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러고 보면 산삼의 효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득 옆집 할아버지가 편찮으셨을 때 산삼을 드셨으면 어떠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산삼이야기도 해봅니다. 옆집 할아버지 댁에 남기고 온 메모로 할아버지 친구분과 연락이 닿았어요. 장례절차를 여쭤보니 코로나 상황이라 여동생 가족이 조용히 치른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 이름을 불러주시며 옆집 할아버지가 ㅇㅇ이가 너와 이웃이어서 아주 행복해했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어요.
막다른 골목(dead-end)에 자리잡고 있어 저희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할아버지 집을 지나와야 해요. 할아버지 집 앞을 지날 때면 아직도 살아계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가 운전하고 나갈 때면 앞마당에서 손 흔들어주시는 모습, 거라지 앞에서 차 수리하는 모습, 이웃들과 담소 나누는 모습들...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아마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이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해요. "It is what it is." 우리네 인생이 다 그렇다지만 가까이서 지내던 분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슬픔은 여전합니다. 문득문득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나곤 해요.